등록 :2022-03-23 04:59 수정 :2022-03-23 08:13 박지영 기자 사진
박수지 기자
1992년 3월22일 군부재자 투표 기무사 개입 폭로
내부 고발 보호법은 훌륭, 권력자들 인식은 아쉬워
“중요한 건 고발 내용의 ‘팩트’ 여부”
22일 오전 11시15분께 이지문(54)씨는 경기 파주에 있는 군부대(9사단 28연대) 앞에 차를 대고 10초가량 말없이 정문을 응시했다.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이씨가 30년 전 복무하던 부대였다. “소원 중 하나가 저 부대 안에 다시 한번 들어가보는 거야. 일기장도 다 두고 나왔어. 다시 돌아올 줄 알고….” 이씨의 혼잣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1992년 3월22일, 스물넷 이지문 중위는 당직을 선 뒤 아침 9시반께 떨리는 마음으로 부대 밖으로 나왔다. 30개월 학군(ROTC) 복무 기간 중 절반을 채웠을 때였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집에 들러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한 뒤, 그날 밤 종로5가 당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사무실을 찾았다. 기자회견장 마이크를 잡고 “군 간부들이 여당 후보 지지와 공개투표를 강요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54살 이지문 전 중위’는 30년 전 오늘(22일)의 동선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그는 남태령 수도방위사령부로 끌려갔다. 수방사 앞에 도착해 하늘을 한번 바라보던 그는 “일요일이던 그날도 오늘처럼 맑고 따뜻했다”고 말했다. 이후 경기 고양에 있는 제9보병사단에서 근무지 무단이탈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3주간 영창에서 복역한 뒤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채 군에서 쫓겨났다. 부대 정문 앞에서 이씨는 당시 받았던 ‘이등병 모자’를 30년 만에 다시 써봤다. 멋쩍은 웃음이 얼굴을 스쳤다.
‘한국 내부고발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지문 내부제보실천운동 상임고문은 이날 <한겨레>와 만나 “내부고발은 좌우나 여야 문제가 아니다”고 30년 자신의 ‘양심선언’이 앞으로도 계속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14대 대선(1992년)에서 ‘60만 국군’이 비밀투표를 보장받게 된 건 그의 전화 한 통 덕분이다. 1992년 3월20일 밤 11시 이씨는 광화문 동화면세점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겨레신문 사회부에 전화를 걸었다. “보병 9사단의 장교인데 군 부재자 투표에 문제가 많아 제보하려고 합니다.” 택시를 타고 신문사를 찾아와 내막을 설명한 그는 이틀 뒤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정권의 군 기무사령부가 14대 총선을 앞두고 군 부재자 투표에 여당 지지표가 쏟아지게 하려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당시 “‘여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정치 안정을 이뤄야 한다’는 내용의 정신교육이 계급별, 중대별로 있었으며, 중대장이나 인사계 등이 지켜보는 앞에서 찍도록 하는 등 공개 기표행위가 공공연히 이뤄졌다”고 밝혔다.
‘데모’ 한번 안했던 87학번 고려대 학생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전역하면 ‘삼성맨’이 될 예정이었으나, 회사는 받아주지 않았다.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대신 지금껏 공익제보 및 내부고발자들을 지원하고 법률·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시민운동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이제 내부고발 관련 보호법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면서도 여전히 내부고발에 부정적인 정치인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인식을 안타까워했다.
이씨는 “내부고발은 좌우나 여야 문제가 아니고 권력이 있는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인데도, 진영 논리에 따라 내부고발자는 흠집내기로 공격을 받아왔다”며 “이런 상황이면 누구도 내부고발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공익제보자 보호를 국정과제에도 포함시켰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등이 여당 의원들로부터 개인적인 공격을 당했던 사실에 실망했다고 한다. 이씨는 “내부고발의 동기는 100%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고발 내용의 ‘팩트’ 여부다”라며, 새 정부에서도 100개의 법보다도 공익제보자에게 대통령이 직접 힘을 실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30년 만에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부정투표 폭로 기자회견 후 영창에 있을 때 쪽지를 넣어준 한 헌병이다. “이 중위님 저희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힘을 잃지 마십시오.” 이씨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쪽지에 힘을 낼 수 있었다. “지금 아마 50대 초반 정도 되셨을 것 같습니다. 광고라도 내서 꼭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