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변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세력이 아니라, 양심과 상식에 반하는 조직의 문제를 고발하는 평범한 개인들이 잇따라 등장한 것은 우리 사회 완전히 결이 다른 흐름의 시작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이 역사를 만든다. 지금도 그러하다.
지난 토요일 ‘이지문 중위 군 부재자 투표 부정 고발 30년’ 기념행사에 갈 생각을 한 건, 얼마 전 봤던 한 프로그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에스비에스>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1990년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를 다뤘다. 방송 인터뷰를 사양하며 그는 “그날의 양심선언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청년이 살기 위해 했던 선택”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탈영과 폭로 전, 보안사 강요에 의한 ‘프락치’ 활동으로 학생운동 시절 동지들을 구속에 이르게 했던 과거의 괴로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해 먹먹했다. 90년대 초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잇단 내부고발에 많은 빚을 졌다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무게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얼굴에 여드름 흔적이 남아 있던 20대 청년 장교 이지문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머리가 희끗해지고 배도 나온” 50대 중반 중년이 됐다.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 등 20년 넘게 내부고발과 반부패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정치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런 그의 주요 생계수단은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연수원에 등록된 전문강사로 1년에 200~300회씩 전국의 공무원이나 기관을 상대로 벌이는 청렴교육 강의다.
장교 복무를 마치면 삼성그룹 입사가 확정돼 있던 ‘범생이’였다. 6월 항쟁 때도 거리시위 한번 나가지 않은 “고려대 정외과에서 드문 학생”이었다. 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밤 기자회견을 하고 헌병들에게 연행되기 전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관계자들과 불렀던 ‘우리 승리하리라’는 처음 듣는 노래라 대충 따라 했다고 한다.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던 그를 수십년간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군 부재자 부정선거를 폭로한 현역 육군 중위로 만든 건, 정의감보다 부끄러움이었다.
당시 직속상관인 육사 출신 중대장은 1번 찍기를 강요하는 정신교육 실시를 처음엔 거부했지만 “서신검열기로 스캔하면 부대별로 여당 지지율이 다 파악된다”는 기무사 파견 보안반장의 압박에 결국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1번을 찍어달라”고 말한 뒤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직업군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중대장이 정치적 중립 신념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현실과 거기 맞서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체포된 이지문과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중대장은 “군복을 입은 나는 끝까지 (네 폭로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처럼 언젠가 밝혀질 거다”라고 말했다. 몇년 전 중대장의 아들이 ‘지금까지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아버지가 부정에 연루됐다는 거냐’고 에스엔에스로 쪽지를 보내왔다. 이지문은 “생애 가장 힘든 답장”을 보냈다.
1988년 동기들의 전방입소 거부 투쟁 기억도 부끄러움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날 안에 입소하지 않으면 학군단 합격은 취소였다. 과 동기회장이 보내주자고 말해 학교 운동장에 서 있던 마지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이등병으로 강등돼 파면됐던 이지문은 1995년 파면처분 취소가 최종확정됐지만 ‘시기가 지났다’는 이유로 삼성 입사를 거부당했다. 당시 다른 대기업이 입사를 보장하며 백지여도 되니 시험만 치라 했다. 접수는 했지만 시험날 가지 않았다. “특혜로 누군가의 자리 하나를 뺏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영웅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이 역사를 만든다. 1992년 말 대선부터 군 부재자 투표는 영외 투표로 바뀌었다. 이지문의 구속적부심사 재판 파행이 이슈가 되며 1993년 사단장 등이 아닌 군판사가 군인의 구속영장을 발부하도록 군사법원법이 개정됐다. 그의 파면 취소 청구소송 승소는 ‘양심선언’ 보호 첫 판결이 됐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는 공안정국과 3당 합당, 그리고 이른바 ‘분신 정국’ 속에서 격렬했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퇴조의 징후를 보이던 시기였다. 그때 사회 전체의 ‘변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세력이 아니라, 양심과 상식에 어긋나는 조직의 문제를 고발하는 개인들이 등장한 것은 완전히 결이 다른 흐름의 시작이었다.
이지문은 “내 사회적 나이는 30살, 사회적 출생지는 한겨레”라고 내게 말했다. 1992년 기자회견 이틀 전인 금요일 밤, 서울 광화문에 도착한 그가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 전화를 걸고 찾아온 곳이 한겨레였다. 그 2년 전 이문옥 감사관도, 윤석양 이병도 그랬다. 진영과 계층으로 갈려 ‘나와 너의 기준’이 달라지고 합리적 의혹을 제기하는 저널리즘의 자리가 좁아진 시대. 하지만 34살 한겨레는 일방적 주장과 조롱이 아니라 상식과 부끄러움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 주말 오후 사람들로 꽉 찬 흥사단 강당에 이지문과 고대 동기들이 함께 부르는 ‘우리 승리하리라’가 울려 퍼졌다.